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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아침묵상

<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 >

by 수원교회 전도인 일동 2022. 4. 4.

 

(사도행전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름은 대상을 대표하는 본성이나 기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름은 실체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나 대상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개인이나 사물은 이름과 함께 존재가 확인되고 타인에게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사람 아담이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은 그가 직접 짐승들의 존재를 확인해 준 것입니다(창세기 2:18-23).

 

아담은 그렇게 명명함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의 본성과 기질을 표현했습니다. 이 명명 행위는 존재를 규명한다는 의미 외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사람의 지배 아래 두게 하셨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심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초기 인류부터 "우리 이름을 내고"라는 슬로건 아래 바벨탑을 건축하여 인간의 이름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인본주의 사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하는 죄악이며 타락한 인간의 삶의 방식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언어가 나뉘고 탑 쌓기가 중단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망령된 이름이나 표현은 파멸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1912,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자존심이라 여기던 타이타닉호가 출항할 때, 언론은 "절대로 침몰될 수 없는 배"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과장했습니다. 그런데 항해 몇 시간 만에 북극에서 떠내려오는 빙산과 충돌하면서 타이타닉호는 두 동강이 났고, 천 오백여 명이 수장되는 참사를 당합니다. 인간의 호언장담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새기게 하는 비운의 사건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은 것은 안디옥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안디옥 사람들은 자기들과 다른 삶을 사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조롱하는 뜻에서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자, 나사렛당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으며, 세간에서 그리 명예스러운 이름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는 사람이라는 본연의 뜻대로 생활했습니다. 안디옥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로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빛나고 존귀한 이름의 의미를 되찾아 후대에 좋은 영적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성경 속에도 자기 이름의 좋은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사시대 엘리 제사장이 그랬습니다. 엘리(Eli)고상함(고귀함), 높음이란 뜻입니다. 엘리는 사무엘 선지자의 스승으로 실로의 대제사장이었지만, 그의 치명적인 결함은 자녀 교육을 소홀히 한 데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여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제사장직을 더럽히고 제사와 제물을 경시했습니다. 마침내, 엘리 가문은 하나님의 징벌로 멸문하였습니다. 결국, 엘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 주님의 존영을 높인다는 본인의 이름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손자 이가봇’,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비극을 맞습니다.

 

여기 또 한 사람, 가룟인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Judah)’라는 뜻은 "그를 찬미 하자, 그를 기억하자"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억하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억한다는 뜻과 정반대로 주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김으로 자신의 영혼이 지옥의 파멸로 떨어진 인생, 어리석음의 끝판왕으로 인류의 역사에 길이 오명을 남기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살아야 할 주체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그리스도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란 성도의 삶에서 피어나는 일종의 체취와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인 가까이에 가면 맡을 수 있는 희생의 향기, 고난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불신자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매우 귀한 향기입니다(고후 2:12~17).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표현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쓰신 편지로 지칭하면서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심비에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편지의 역할을 해야합니다(3:1-5).

세 번째, 그리스도인을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천하고 약하지만 그 안에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4:1-15).

네 번째, 그리스도인을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역행해서 속사람이 새로워지려면 눈에 보이는 환난의 경한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에 집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4:16-18).

다섯 번째, 바울 사도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신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5:18-19).

여섯 번째,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하나님의 일꾼으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일개 피조물이지만,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는 자입니다(6:1-13).

일곱 번째, 그리스도인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표현합니다(6:16-18).

 

결국,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는 자이기에 세상과는 구별된 삶, 곧 낮아지고 희생하는 삶, 그리스도의 인격인 온유와 겸손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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