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아침묵상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

수원교회 전도인 일동 2022. 11. 2. 22:16

빌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 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사도는 복음으로 인하여 로마에 투옥되어 미결수의 신분으로 빌립보 교회에 서신을 보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옥에 갇힘을 보고 교만으로 바울보다 앞서려는 자들과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로 인해서 투기와 분쟁으로 교회를 혼란케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로인해서 사도는 이제는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마음에서 올라오는 두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 그리고 육신에 거하며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남는 것 이 두 사이에서 비록 지금은 육신의 궁핍과 어려움가운데 있지만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남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욕망이 자신에게는 더욱 좋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사도의 이 욕망의 시발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으로 돌에 맞아 죽을 고비에서 세째하늘로 이끌리어 곧 낙원을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그곳에서 주님께 직접 계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깨어선 제자들의 마음을 더욱 굳게하고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저희의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행 14:22)

 

  바울사도는 죽을 지경에 처하기도 하며 많은 환난과 고난이 그를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갈 수 있었던 것은 낙원에서 주님께 직접받은 계시가 너무나 크고  주님의 영광 앞에 비춰진 자신을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많은 환난과 어려움속에서도 복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자들 또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의 소망을 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주님이 오실 날 만을 간절히 소망하고 인내로 기다릴 겁니다. 

 

막 13: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예사롭지 않게 일어나는 시대적 징조들을 보면서도 무감각해진 이 시대에 각자의 삶을 헤아려보는 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감옥에서 바울사도는 빨리 죽어서 주님께로 가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이 있었으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구원을 받게 하며 빌립보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의 이러한 소망은 아마도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주님을 만나게 되면 세상의 모든 행적은 곧 지나갈 것이며 이로인해 육체의 남은 때를 자신이 아닌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잠시이며 그것은 주님께 주어질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설명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형틀을 피로 적시고 영생의 열매를 맺은 것처럼,  스데반이 죽음으로, 바울이 비록 옥에 갇혔지만 복음이 더욱 확장되는 복음이 진보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아들 요셉을 잘 압니다.

그는 형들로 인해서 미디안 상인에게 팔리고 이후 13년동안 종살이와 억울한 감옥생활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과거 13년이라는 고난의 길이 때론 무거웠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의 고난의 여정 가운데 인도하셨고, 그는 애굽에서 형제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성도는 한시적인 환경을 보고 낙담하기 보다는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섭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우리의 고난의 여정들을 인내로 잘 통과하는 믿음이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모든 그리스도의 삶은 헤아려 집니다.

바울사도는 이점을 상기할 때 잠시나마 육신에 거하며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유익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주님의 때가 가깝습니다. 우리의 삶을 헤아려 볼 때 입니다. 이제 얼마 안되어
“네가 내 것을 가지고 네 뜻대로 살았느냐? 내 영광을 위하여 살았느냐?  라고 주님은 물어보지 않겠습니까?

 

빌립보교회 안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3:18-19)

 

하나님은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가에게 물어보십니다.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완악한 백성들에게 멸망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의 사명은 무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이 일을 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그의 자녀들이 자원해서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물어 보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의 환경을 생각하고 자기 십자가를 정리하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부르신 그 곳에서 그 환경에서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더욱 주님의 때가 가까운 시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하나님은 이 희생을 통해서 영생의 열매 맺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