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아침묵상

<혼돈의 시대에 성도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 : 불변하는 하나님 말씀>

수원교회 전도인 일동 2022. 9. 17. 08:48

  

   「어우야담을 쓴 유몽인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유몽인은 문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세상의 공론이 그렇지 않아서 관직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카 유활이 편지를 보내자 유몽인은 어우야담의 저자답게 다음과 같은 우화 같은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줍니다.

 

   « 쥐와 벼룩이 서로 자기가 크다고 싸웠는데, 서로 우기기만 할뿐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벼룩이 쥐에게 말했다. 너는 나보다 작으면서 왜 그렇게 우기는 게냐? 우리, 길 가는 사람들의 공론을 한번 들어볼까? 쥐가 자신만만하게 사람들이 다니는 한길에 죽은 시늉을 하며, 벌렁 눕자 벼룩도 그 옆에 누웠다. 길 가는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말했다. , 엄청 크네! 쥐가 가죽 신발만 하다니. 어이쿠! 벼룩은 보리항아리만 하구나. 벼룩이 의기양양해서 쥐에게 따져 물었다. 신발이 크냐, 항아리가 크냐? 이 말을 들은 쥐는 찍소리도 못했고, 결국 승리는 벼룩에게 돌아갔다. »

 

   벼룩이 아무리 크다 해도 쥐와 비교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공론을 앞세운 벼룩이 쥐를 이긴 것입니다. 유몽인은 위의 우화를 들려준 뒤에 편지 말미에 쥐와 벼룩이 누가 큰지 겨루는 일이며 그에 대한 공론 따위, 나는 귀를 막고 듣지 않은 지 오래다. 너도 전혀 신경 쓸 거 없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어떤 가치를 평가할 때 사람들은 공론에 붙여야 한다!고 말합니. 하지만 그 공론의 결과가 쥐와 벼룩의 다툼에서 보듯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다수의 공론은 근거가 취약할 뿐입니다. 공론은 사적인 의견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공정하게 도출한 의견을 뜻합니다. 다수결도 비슷한 개념입니다. 가치판단에서 항상 다수의 의견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오직 불변하는 진리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지만, 우리 시대 참 진리의 부재 속에 많은 가치가 전도되고 기준이 와해 되는 것을 봅니다.

 

   성경 이사야 520절 말씀에도 가치가 전도된 죄악상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선지자 시대, 이스라엘의 죄악은 자신들이 전혀 쓸모없는 자들로 남은 것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 전혀 쓸모없는 자가 되도록 말하고 전하였으며 선동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불법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자들을 의롭다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을 자극하여 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보다 적극적인 죄악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지나간 시대에도 그렇듯이 현시대에도 행악을 옳다하여 가치를 전도시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혼돈 속에서 변하지 않는 기준과 가치를 제시해주시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8). 주님은 I was, I will도 아니시며, 언제나 I AM이십니다. 모든 것이 변해도 결코 변할 수 없으며, 변치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말라기 36절 말씀에서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고 언급하시듯, 오직 주님 한 분만 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불변성은 우리 믿음의 확고한 기반이 되며,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닻이 됩니다. 변함이 없는 주님을 소유한 자들은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그리스도인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편 16:8).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흔들리는 세상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기준에 맞추어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명백히 계시된 주님의 말씀에 맞추어 믿음으로 순종하고, 주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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